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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흥망사] 스마트폰 선구자 '블랙베리'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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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동아 김영우 기자]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폰’을 공급하는 애플,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개발한 구글, 그리고 ‘갤럭시’ 시리즈를 제조하는 삼성전자 등의 기업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애플이나 구글, 삼성전자보다도 한 발 앞서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장을 연 선구자가 있었다. 바로 캐나다의 IT 기업인 ‘블랙베리(BlackBerry)’다. 하지만 지금 스마트폰 시장에서 블랙베리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블랙베리 로고

캐나다 출신 공학도 2명이 쏴 올린 혁신의 불꽃

블랙베리는 1984년,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 출신의 마이크 라자리디스(Mike Lazaridis), 그리고 원저 대학교 출신의 더글러스 프레긴(Douglas Fregin)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당초의 회사명은 ‘리서치 인 모션(Research In Motion, 약자 RIM)’이었는데, RIM은 당시 캐나다에선 보기 드문 무선 데이터 통신기술 전문 업체였다.

블랙베리의 설립자인 마이크 라자리디스(Mike Lazaridis)

RIM은 1990년대까지는 무선 통신 기능에 대응하는 POS 솔루션, 무선 모뎀 등에 집중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1996년에는 양방향 통신 기능을 갖춘 최초의 호출기(일명 삐삐)인 ‘인터랙티브 페이저(Inter@ctive Pager) 900’을 출시하며 상당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별도의 전화기와 함께 이용해야 했던 일반적인 호출기와 달리 자체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고, 온전한 형태의 쿼티(QWERTY) 키보드까지 갖춘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한층 작은 사이즈에 세련된 디자인을 갖춘 후속작, ‘인터랙티브 페이저 950’을 선보이며 높은 기술적 역량을 증명했다.

1996년에 출시된 RIM 인터랙티브 페이저 900

그리고 1999년, RIM은 보다 성능이 향상된 양방향 호출기인 ‘블랙베리(BlackBerry) 850’을 출시했다. 이는 RIM 최초로 ‘블랙베리’ 브랜드를 도입한 제품이었는데, 이는 RIM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인 키보드 디자인이 블랙베리 과실의 모습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블랙베리 850은 BES(BlackBerry Enterprise Server)를 통해 푸시 이메일 기능을 쓸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의 모바일 기기로선 매우 획기적이었다. 특히 기업 시장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PC 없이 어디서나 이메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덕분이었다.

블랙베리, 스마트폰 시장의 여명을 열다

블랙베리 850이 상당한 인기를 끌긴 했지만, 2000년대 들어 모바일 기기의 중심은 호출기에서 휴대전화로 이동하고 있었다. RIM 역시 휴대전화 개발을 본격화했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은 2000년 4월에 나온 ‘블랙베리 957(BlackBerry 957)’ 스마트폰이었다.

스마트폰 시대의 여명을 연 블랙베리 957(2000년)

이전에도 IBM이나 노키아 등이 초기형태의 스마트폰을 선보인 적이 있었지만 활용성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베리 957은 이전의 블랙베리 호출기에서 이미 성능을 인정받은 푸시 이메일 기능 및 쓰기 편한 쿼티 키보드를 갖춘데다, 다양한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독자적인 스마트폰 전용 운영체제 ‘블랙베리 OS’를 탑재하고 있었다. 기능뿐 아니라 보안성 역시 우수해서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에서도 블랙베리 스마트폰은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역시 대표적인 블랙베리 스마트폰 사용자 중의 한 명이었다.

경쟁자의 등장에도 거침이 없던 블랙베리

거침없이 성장을 거듭하며 스마트폰 시장을 이끌던 블랙베리 앞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모습을 드러낸 건 2007년의 일이었다. 애플에서 풀 터치 스크린 기반의 스마트폰인 ‘아이폰(iPhone)’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애플의 아이폰은 미려한 디자인에 세련된 인터페이스, 그리고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과시하며 특히 일반인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RIM 측은 충분히 할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스마트폰 시장은 기업 시장이 중심이었고 블랙베리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RIM 역시 일반 소비자를 위해 컬러 화면 및 카메라, 음악과 같은 멀티미디어 기능을 보강한 블랙베리 펄(BlackBerry Pearl) 시리즈를 2006년부터 출시해 적잖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었다.

멀티미디어 기능을 보강한 블랙베리 펄 8120(2006년)

실제로 첫 번째 아이폰이 발표되었을 때 상당수 언론에선 ‘블랙베리 킬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만큼 당시 스마트폰 시장에서 블랙베리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아이폰의 등장으로 인해 전체 스마트폰 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는데, 블랙베리 진영 입장에서도 이는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폰이 인기를 끌긴 했지만 블랙베리는 그 이상으로 팔리고 있었다. 2010년 즈음까지 미국 시장에서 블랙베리 사용자는 2,300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미국 전체 스마트폰 사용자의 40%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변화하는 시장, 변하지 않는 블랙베리

하지만 문제는 스마트폰 자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을 둘러싼 ‘생태계’였다. 애플은 아이폰 사용자를 위한 ‘앱 스토어’를 열고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의 참여 문턱을 한껏 낮춰 짧은 기간 동안 방대한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이폰의 활용성은 거의 무한대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일반 소비자를 위한 오락용 콘텐츠는 물론, 기업을 위한 업무용 콘텐츠 역시 충실해져서 블랙베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방성을 강조한 구글의 모바일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Android)가 2007년에 발표되고, 2009년을 즈음해 삼성전자, LG전자, HTC, 모토로라 등의 다양한 단말기 제조사에서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폰을 대거 출시하기 시작한 것 역시 RIM에겐 치명타였다. 아이폰만큼 콘텐츠가 풍부한 것도 아니고, 안드로이드 진영만큼 다양한 단말기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블랙베리는 소비자들에게 점차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고급스런 디자인을 강조한 블랙베리 볼드 9900(2009년)

물론, RIM이 이런 상황을 손 놓고 방치한 건 아니었다. 디자인을 고급화한 ‘블랙베리 볼드(BlackBerry Bold)’ 시리즈를 2009년에, 슬라이드형 쿼티 키보드를 탑재한 ‘블랙베리 토치(BlackBerry Torch)’ 시리즈를 2010년에 내놓았다. 그리고 2011년에는 애플 아이패드에 대응하기 위해 태블릿 컴퓨터인 ‘블랙베리 플레이북(BlackBerry PlayBook)’을 내놓는 등, 애플과 구글의 전방위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들 제품은 대부분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2010년 즈음부터 이미 모바일 콘텐츠 생태계는 개방성이 높은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중심이 되었다. RIM의 블랙베리 OS는 우수한 보안성을 장점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폐쇄성이라는 다른 한편의 단점을 극복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했다.

또한 블랙베리의 정체성과 같았던 쿼티 키보드 역시 더 이상 장점이 될 수 없었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은 풀 터치 스크린에 최적화된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고 있었고, 이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선호하는 일반 소비자들의 요구에 적합했다. 반면, 블랙베리는 기업 환경에 특화된 쿼티 키보드 인터페이스에 집착했는데, 이는 이미 일반 소비자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스마트폰 시장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2013년, 회사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회사명을 RIM에서 ‘블랙베리’로 바꾸고 풀 터치 스크린을 탑재한’ 블랙베리 Z10(BlackBerry Z10)’을 출시하기도 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급격한 몰락

2010년과 2013년 사이에 RIM의 주가는 87% 가까이 폭락했다. 신제품들의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적자폭이 눈덩이처럼 커졌으며, 급기야 2012년 1월에는 블랙베리의 창업자인 마이크 라자리디스 CEO가 사임을 발표하며 회사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시장 점유율은 더욱 하락해 2016년 미국 스마트폰 시장 기준, 블랙베리는 불과 0.8%의 점유율을 기록할 정도로 사세가 쪼그라들었다.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블랙베리 프리브(2015년)

궁지에 몰린 블랙베리는 2015년, 자체 운영체제인 블랙베리 OS가 아닌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스마트폰인 ‘블랙베리 프리브(BlackBerry Priv)’를 내놓는 등의 과감한 행보를 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2016년 9월, 블랙베리는 하드웨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고 자사 제품의 개발 및 생산을 외부 업체에 위임한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소프트웨어의 개발은 이어지고, 외부 업체인 TCL을 통해 블랙베리 브랜드의 스마트폰을 출시했지만, 사실상 스마트폰 제조사로서 블랙베리의 수명은 다했다고 다수의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그리고 2020년 2월, 블랙베리 브랜드로 스마트폰을 팔던 TCL은 같은 해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블랙베리 스마트폰의 출시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영광에 취해 혁신 멈춘 선구자

2000년대 초까지의 블랙베리는 남다른 기술력과 차별화된 기획력을 중심으로 스마트폰 시장의 여명을 연 선구자적인 기업이었다. 특히 절제된 디자인 및 높은 보안성, 그리고 쿼티 키보드의 유용성을 인정받아 기업용 시장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한때는 해외 스마트폰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0년 현재, 어딜 봐도 스마트폰이 눈에 띄지만, 스마트폰 시장의 선구자라는 블랙베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선구자라는 이름에 안주한 채 시장의 변화에는 눈을 감았으며, 소비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랙베리의 전성기에서 퇴출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겨우 10여 년에 불과하다. 한때의 영광에 취해 혁신의 노력을 멈춘다면 이는 곧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현대 시장의 진리를 몸소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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