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동아 김영우 기자] IT산업에 있어 특정한 제품이나 기술의 '표준'이 된다는 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해당 표준 규격에 대한 권리를 보유하고 기업은 해당 산업 전반을 좌지우지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해당 표준에 맞춰 개발한 자사 제품의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당 표준을 따라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경쟁사에게 로열티나 라이선스 비용 등을 받아 금전적 이득을 얻을 수도 있다.
때문에 새로운 기술 표준을 정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각 기업들은 저마다의 실력을 총동원해 개발한 자사의 기술을 산업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만약 혼자의 힘으로는 힘이 부친다면 이해를 공유하는 다른 기업들과 연합을 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혹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IT기술 '표준전쟁'의 사례 및 근황을 살펴보자.
VHS – 베타맥스: 비디오 테이프 표준전쟁(1970년대 중반 ~ 1980년대 중반)
1970년대 중 후반은 가정용 홈 비디오의 시대가 본격 태동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 때를 즈음해 등장한 것이 일본 빅터(JVC)의 VHS 규격 비디오 테이프 시스템, 그리고 소니의 베타멕스(Betamax) 비디오 테이프 시스템이었다. 양사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홈 비디오 업계의 표준을 노렸다.
<베타맥스(위)와 VHS(아래) 방식 비디오 테이프의 비교(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시작은 베타맥스가 더 좋았다. VHS에 비해 화질이 우수했으며, 테이프 카세트의 크기도 작아 휴대도 간편했다. 하지만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베타맥스 테이프의 최대 녹화시간은 100분 정도로 짧은 편이라 영화 한 편을 온전하게 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VHS의 경우, 화질이나 휴대성 면에서는 한 수 아래였지만 테이프 당 최대 녹화시간이 160분으로 길어 대부분의 영화를 담는데 문제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베타맥스 규격을 이용한 콘텐츠를 출시하려면 소니의 품질 정책을 준수해야 했는데, 그 중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외설적인 콘텐츠를 제약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반면, VHS 에는 그런 제약이 없어 콘텐츠 제작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VHS 진영은 콘텐츠 규모 면에서 베타맥스 진영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8년, 소니는 사실상 베타맥스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USB – IEEE1394: 데이터 인터페이스 표준경쟁(1990년대 초반 ~ 2000년대 초반)
1995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인 '윈도우95'가 출시되면서 PC는 한층 쓰기 쉽게 변하며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와중에 PC와 접속해 이용하는 주변기기 역시 크게 늘어났는데, 기존의 직렬포트나 병렬포트는 데이터 전송속도나 편의성 측면에서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한층 고성능이면서 쓰기 편한 데이터 인터페이스가 하나 둘 개발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것이 'IEEE1394'와 'USB'였다.
<USB(왼쪽)와 IEEE1394(오른쪽) 방식 포트의 비교>
IEEE1394 인터페이스와 USB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기존의 직렬이나 병렬 포트보다 빠르게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며, 별다른 설정 없이 장치를 꽂기만 하면 곧장 사용이 가능해 윈도우95와 같은 대중적인 운영체제와 궁합도 좋았다. 하지만 성능 면에선 큰 차이가 있었다. 특히 데이터 전송 속도의 경우, IEEE1394는 1995년에 등장한 첫 규격부터 최대 400Mbps에 달하는 빠른 데이터 전송능력을 발휘한 반면, USB 1.0/1.1 버전의 데이터 전송속도는 최대 12Mbps에 불과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시장에서는 USB 인터페이스가 훨씬 호평을 받았다. 특히 IEEE1394의 경우, 이를 적용된 기기를 생산하기 위해 일정액의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때문에 IEEE1394 규격을 주도적으로 개발한 소니나 애플의 제품 외에는 탑재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때문에 USB의 보급률이 폭발적으로 높아지는 동안 IEEE1394는 내리막길을 걷다가 2010년 즈음부터는 IEEE1394를 적용한 IT제품이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블루레이 – HD DVD: 고화질 영상매체 표준경쟁(2006년~2008년)
1980년대 홈비디오 시장을 주도하던 VHS 비디오 테이프는 1990년대 들어 광 디스크 매체인 DVD에 자리를 넘겨줬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HD급, 풀HD급 고화질 영상을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광 디스크 매체가 등장했는데 유력한 후보는 소니 주도로 개발한 블루레이(Blu-ray) 디스크와 도시바 주도로 개발된 HD DVD였다.
<같은 영화가 블루레이(왼쪽)와 HD DVD(오른쪽) 방식으로 따로 출시되기도 했다>
두 매체는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로 호환은 되지 않았다. 때문에 2006년을 기점으로 차세대 DVD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생산 비용이 저렴한 HD DVD 진영이 앞서가는 듯 했으나, 보다 큰 용량을 저장할 수 있고 더 많은 할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의 지지를 얻은 블루레이 진영이 점차 더 힘을 얻기 시작했다.
결국 2008년, 도시바가 HD DVD 사업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면서 블루레이가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블루레이와 HD DVD 사이의 표준 규격 경쟁은 1970~1980년대 사이에 일어난 비디오 테이프 규격 경쟁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나 의외로 짧은 기간 안에 마무리가 지어진다.
HDMI – DP: 디지털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 표준경쟁(2006년 ~ 진행 중)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품질이 점차 향상되면서 이를 출력장치(모니터, TV)로 전송하는 인터페이스 역시 진화가 진행된다. 특히 2003년에 히타치, 파나소닉, 소니, 필립스, 톰슨 등의 AV 가전 업체들이 공동 개발한 HDMI는 디지털 방식의 고품질 영상 및 음향을 하나의 케이블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HDMI (High-Definition Multimedia Interface)는 성능과 편의성 면에서 모두 호평을 받으며 순조롭게 보급률을 높이고 있었다.
<3개의 DP와 1개의 HDMI를 갖춘 AMD 라데온 R9 퓨리X 그래픽카드>
하지만 이런 상황에 PC 관련 업체들은 다소 불만을 표했다. HDMI를 적용한 기기를 생산하기 위해선 이 규격을 개발한 AV 가전업체들의 연합체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2006년, 인텔, AMD, 델, HP, 애플과 같은 PC 관련 업체들의 강력한 지지 속에 디스플레이포트(약자 DP) 규격이 등장했다.
DP는 HDMI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생산하는데 라이선스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특히 PC 업체들이 선호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출시되는 그래픽카드나 모니터에는 DP를 탑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한 발 먼저 등장한 HDMI의 시장 지배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DP를 단독 탑재하기보단 HDMI와 병행 탑재하는 경우가 더 많다. HDMI와 DP는 경쟁을 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한쪽이 완전히 시장을 지배하기보다는 공존하는 형태로 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싱크 – 프리싱크: 모니터 화면 보정 기술 표준경쟁(2013년 ~ 진행 중)
컴퓨터의 GPU(그래픽 처리장치, 그래픽카드 핵심 칩) 성능이 눈에 띄게 향상되면서 이를 받아들이는 모니터가 이를 미처 모두 소화하지 못하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특히 모니터의 주사율(1초에 전환 표시할 수 있는 장면의 수)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초당 프레임을 구현하는 GPU를 이용할 경우, 화면 일부가 갈라지며 이미지를 왜곡하는 테어링(tearing) 현상이 발생하곤 한다. 이를 방지하는 범용 기술인 수직동기화(V Sync)가 있다. 하지만, 이를 적용하면 GPU의 성능을 인위적으로 억제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초당 프레임이 급격하게 변하며 게임과 같이 움직임이 빠른 콘텐츠를 즐길 때 지장을 주기도 한다.
이로 인해 수직동기화의 한계를 극복하며 테어링 현상을 억제하는 기술이 GPU 제조사를 통해 개발되었다. 2013년에는 엔비디아사에서 지싱크(G-Sync) 기술이, 이듬해인 2014년에는 AMD에서 프리싱크(FreeSync) 기술이 발표된다. 지싱크와 프리싱크는 GPU에서 출력되는 이미지의 초당 프레임과 모니터의 주사율을 실시간으로 동기화하는 기술로, 이를 적용한 GPU와 모니터를 함께 이용하면 수직동기화를 적용하지 않고도 깔끔한 화면을 볼 수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의 지원으로 지싱크에 비해 프리싱크 기술이 좀 더 빠르게 보급되는 추세다>
양사는 현재 팔리고 있는 자사의 GPU에 이를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모니터 업체들을 상대로 자사의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다만, 지싱크의 경우, 모니터에 전용 하드웨어를 탑재해야 하고 라이선스 비용을 엔비디아에 지불해야 하지만, 프리싱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2015년 현재, 지싱크 보다는 프리싱크를 기술이 한층 더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 LG전자등의 업체들은 프리싱크 방식 모니터를 다수 출시한 반면, 지싱크 방식 모니터는 내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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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